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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공격과 노인공경의 기로 : 싸움 구경이 제일 재미있나보다

10월 30일 사건을 마무리하고 쓰는 기록

 

10월 30일 촬영 스케줄이 있어서 교동 쪽 모 업체에 5시까지 도착해야하는 상황이었다.

이것저것 살 겸, 시장 조사도 할 겸 동성로로 일찍 나가서 할 일을 다 했음에도

시간이 1시간 정도 애매하게 남아 대구 교동 쪽 빽다방에 들어가서 음료를 시켰다.

 

매장 가장 구석에 앉아서 조용히 파일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부부는 아니지만 꽤 가까워보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들어왔다.

이 때까지만 해도 그 사람들에게 별 다른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다.

 

주문을 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있었는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음료가 나온 뒤에

본인들은 따뜻한 걸 주문했는데 왜 시원한 음료가 나왔냐고 따졌고

알바는 아까 분명 다시 확인 했을 때도 시원한 걸 달라고 하셨으면서

왜 음료가 나오니까 말을 바꾸냐며 실랑이가 있었다.

이 때부터 슬슬 신경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결국 알바는 음료를 따뜻한 걸로 바꿔드렸으나

두 분은 음료를 잘못 시킨 것에 대한 문책을 서로 하는지 티격태격거렸다.

나는 내 할 일에 다시 집중하고 있었는데

할머니가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아버지가 뜨거운 커피를 할머니한테 쏟은 것이었다.

할머니는 음료를 잘못 주문한 것 + 음료를 쏟은 것까지 할아버지에게 화를 냈다

(지금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음료도 일부러 쏟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자 갑자기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발로 차고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성인이 되고 사람을 '팬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어울릴 정도로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그 날 처음 목격했다.

 

할머니가 맞는 것을 보는 것과 동시에 이성의 안전핀이 뽑히는 것 같아서

할아버지한테 달려가서 멱살을 잡고 벽으로 몰아세우고 할머니한테서 떨어뜨렸다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욕을 했고 가게가 소란스럽자 매니저가 나와서 할아버지를 쫒아냈다

 

할아버지 나이가 60대 후반 정도는 되어 보였는데

본인의 분을 이기지 못하고 쒹쒹대고 있었으나 매니저 피지컬이 훨씬 좋아서 그런지

매장 밖으로 나가서 할머니보고 나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를 뿐 별다른 저항을 하진 않았다

다만 내가 신경쓰였던 것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아는 사이임은 분명한데

할아버지가 나가면서 보복을 예고하고 갔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 일어나는 보복 범죄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그냥 가볍게 넘길 수가 없었다.

 

듣도보도 못한 쌍욕을 할머니께 하며 가게에서 쫓겨나갔는데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아서 할머니께 닦을 휴지를 드리고 다시 매장 밖으로 나가서

그 할아버지가 어디까지 갔는지 보려고 했는데 그 때부터 시비의 타겟이 나로 바뀌었다

 

나한테 부모 욕을 비롯한 온갖 욕설을 하길래 처음에는 그냥 갈 길 가시라고 좋게 말했으나

참는 게 한계가 있어서 나도 똑같이 반말로 얘기를 했다.

손주뻘 돼 보이는 사람이 반말을 하는데다가 아까 매장에서 쫓겨난 게 쪽팔려서 그런지

슬슬 나를 건드리려 하더니만 발길질과 주먹질을 시작했다

 

어깨 쪽을 한 대 맞았는데 그 순간부터 1초에 몇 번은 생각한 것 같다

지금 나도 때리면 쌍방폭행인데 그냥 줘패버려야되나...?

일단 내가 맞았으니 경찰에 신고를 넣고 그 전에 도망가지 않게 계속 약을 올렸다

 

못 때리는게 분하셨겠지만 안타깝게도 세월 앞에 장사없다고

내가 아무리 체구가 작아도 할배한테 맞고 있을 일은 없다

신고 후 10여분 뒤에 경찰이 도착했고 할아버지는 자기는 때린 적 없다고 발 뺌했다.

 

일단 매장 cctv에 찍힌 할머니를 폭행하는 증거영상은 있었으나

나는 밖에서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증빙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할아버지는 경찰이 도착했음에도 행패를 부려서 결국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갔고

나는 다음 스케줄이 있어서 간단한 서류만 작성하고 일을 하러 갔다.


사건이 있었던 그 날은 그냥 맞았을 때 나도 참지말고 패버릴걸 그랬나 싶다가도

가만히 놔둬도 곧 세상 뜨실 것 같은데 굳이 내가 때려서 일 만들필요 있겠다 싶었다.

 

그렇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할머니를 폭행해놓고는 도리어 큰소리내는 할배 꼴이 역겨워서

합의 안 해주고 참교육이라는 걸 보여드려야하나 싶기도 했다.

 

죄목은 폭행죄였고 나는 맞은 사실은 있으나 상해가 남지 않았기 때문에

상해죄를 적용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할배가 때린 오른쪽 어깨를 봤는데 멍도 안 들었더라

영감탱이 때릴려면 확실하게 증거를 남기든가 ㅡㅡ

 

결과적으로 오늘 대구 중부경찰서에 전화해서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전했다.

가장 큰 이유는 일단 내가 상해를 입지 않았고 cctv 확보가 되지 않아서 증빙이 힘들고

무엇보다 귀찮다. 돈 몇 푼 뜯어내려고 감정, 시간 소비하기에는

내 시급이 너무 많이 올라서 합의에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본인보다 강하면 약하게 굴고

약하면 강하게 구는 한남 특유의 강약약강을 참교육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할배 발길질 피하면서 딱밤이라도 몇 대 때릴 걸 하는 후회가 남는다.

 

마지막으로,,, 아무도 할머니가 맞을 때 도와주지 않았다

그 카페 안에 나를 제외한 손님이 4테이블 정도는 있었는데

할머니가 맞는 것, 내가 할아버지를 제지 하는 것,

심지어 대구 시내 교동 한복판에서 할아버지가 나한테 쌍욕을 하면서

발길질 주먹질 하는데 지나가는 사람들 그냥 구경만 하고 있더라.

 

여러모로 많은 것을 느꼈다.